조건만남보다 무서운 조건부 증여

 


조건만남보다 무서운 조건부 증여

서울가정법원 3층 복도에는 이상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보통 법원 복도에는 세 가지 냄새가 난다. 커피 냄새, 긴장 냄새, 그리고 “내가 분명 이길 줄 알았는데” 하는 인간 특유의 패배 예감 냄새.

그날 복도 한쪽에는 말끔한 정장을 입은 남자, 강태오가 앉아 있었다. 그는 6년 동안 한 여성에게 주식투자금, 위자료, 생활비, 마음값, 인생수업료 등 이름만 들으면 대기업 회계팀도 울고 갈 명목으로 총 9억 원이 넘는 돈을 보낸 사람이었다.

반대편에는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얹은 여자, 민서라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차분했다. 너무 차분해서 법원 복도보다 은행 VIP 라운지에 더 어울렸다.

태오는 서라를 보며 말했다.

“그 돈, 빌려준 거야.”

서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빠, 6년 동안 빌려줬다는 사람이 차용증 하나 없어?”

“마음으로 썼잖아.”

“마음은 민법상 증거능력이 약하지 않을까?”

태오는 입을 다물었다. 사랑은 법정에 들어오면 갑자기 문과 출신이 된다.

잠시 후 재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는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원고는 피고에게 지급한 7억 원 상당의 금원을 대여금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빌려준 돈입니다. 언젠가 돌려받을 생각이었습니다.”

판사가 물었다.

“언제가 언젠가였습니까?”

“그건…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대여금 상환 기일이 분위기입니까?”

법정 안이 조용해졌다. 방청석 뒤쪽에서 누군가 기침을 했다. 아마 웃음을 숨기려다 기관지에 양심이 걸린 듯했다.

서라 측 변호사가 일어났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원고는 피고에게 장기간 반복적으로 돈을 지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차용증도 없고, 이자 약정도 없으며, 변제기 약정도 없습니다. 이는 대여가 아니라 증여로 보아야 합니다.”

태오가 벌떡 일어났다.

“증여라니요! 저는 사랑으로 준 겁니다!”

판사가 고개를 들었다.

“사랑으로 줬으면 더더욱 대여가 아니지 않습니까?”

태오는 다시 앉았다. 법정은 무서운 곳이었다. 말이 너무 빨리 자기 목을 조른다.

재판은 길지 않았다.

판결은 간단했다.

“원고 패소.”

태오는 입을 벌렸다.

“그럼 7억을 못 돌려받는 겁니까?”

판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민사상 대여금으로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서라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복권 당첨번호를 확인한 사람처럼 조용한 승리를 누렸다.

그때였다.

천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두두두두두두.

모두가 위를 올려다봤다.

천장 타일 하나가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셋이 줄을 타고 내려왔다. 맨 앞의 남자는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가방에는 큼지막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국세청”

법정이 얼어붙었다.

판사도 잠시 말을 잃었다.

국세청 직원은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옷깃을 정리했다.

“안녕하십니까. 지나가던 국세청입니다.”

태오가 멍하니 말했다.

“지나가던 국세청이 왜 천장에서 내려와요?”

직원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증여 냄새가 나서요.”

서라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평온함이 사라졌다.

“잠깐만요. 무슨 증여요?”

직원은 태블릿을 켰다.

“방금 민사소송에서 해당 금원이 대여금이 아니라 증여성 금원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도 할 일이 생깁니다.”

서라는 웃으려 했다.

“아니, 그건 그냥 소송에서 그렇게 된 거고요.”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도 그냥 세금 계산하면 됩니다.”

“얼마나요?”

직원은 잠시 화면을 내렸다가 올렸다.

“대략 5억 3천만 원 상당의 증여세 관련 검토가 가능합니다.”

서라는 조용히 선글라스를 내려썼다.

태오는 옆에서 눈을 반짝였다.

“그럼 제가 이긴 건가요?”

국세청 직원이 말했다.

“아닙니다. 원고님은 돈을 못 돌려받고, 피고님은 세금을 낼 수 있습니다. 모두가 불행해지는 매우 균형 잡힌 결말입니다.”

판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사법 정의인가…”

직원은 서라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안내문입니다.”

서라는 봉투를 받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너무하잖아요. 저는 위자료라고 생각했어요.”

직원이 미소를 지었다.

“위자료라면 손해배상 성격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럼 사랑값은요?”

“과세됩니다.”

“마음고생비는요?”

“입증하세요.”

“청춘 보상금은요?”

“명목은 자유지만 과세 판단은 저희 자유입니다.”

태오는 옆에서 감동한 표정으로 박수를 치려다 판사의 눈빛을 보고 손을 내렸다.

법정을 나온 서라는 변호사를 붙잡았다.

“선생님, 이거 어떻게 안 돼요?”

변호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민사에서는 이겼는데 세무에서 졌습니다.”

“그게 말이 돼요?”

“대한민국에서는 종종 됩니다.”

그때 태오가 다가왔다.

“서라야.”

서라가 노려봤다.

“왜.”

태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돈 못 돌려받는 건 슬픈데… 네가 세금 내는 건 조금 위로가 된다.”

서라는 미소를 지었다.

“오빠.”

“응?”

“너도 증여한 사람이라 조사받을 수 있어.”

태오의 얼굴이 굳었다.

국세청 직원이 뒤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희는 균형을 좋아합니다.”

태오는 하늘을 봤다.

법원 천장은 이미 닫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알았다. 국세청은 천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통장에도 있고, 판결문에도 있고, 심지어 추억 속 계좌이체 메모에도 있었다.

그날 이후 태오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돈을 빌려줄 땐 차용증을 써라.”

친구가 물었다.

“사랑하면?”

태오는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하면 더 써라.”

한편 서라는 세무서 앞 카페에 앉아 영수증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중얼거렸다.

“사랑은 끝났고, 세금은 남았네.”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 물었다.

“그게 인생인가요?”

서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가산세예요.”

그리고 세상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적어도 국세청 입장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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